2216 이지윤



겨울이 왔다. 다시 찾아온 한파에 나는 추위를 떨쳐내려 밤색 목도리를 둘렀다. 따뜻하면서도 목을 조이는 목도리를 두를 때면 천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붉은 목도리를 뜨며 밝게 웃던 천지의 얼굴. 그리고 그 목도리를 두르고 세상을 먼저 떠난 천지의 얼굴.
둘째 아이를 작별하고 어느덧 다섯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만지는 거친 풍파가 지나간 후 더이상 동생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집 안에서는 천지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잔인하게 불어닥치는 한파가 오면 천지가 떠난 그 날의 계절이 딸아이와의 추억을 무색하게도 가져왔다. 무색한 기억, 무색한 계절. 나는 차갑게 식은 마룻바닥을 만지며 무색한 계절의 온기를 느껴보았다. 눈치도 없이 찾아온 이 계절도 천지의 자취를 가져와 준 따스한 온기가 있겠지. 무색한 이 계절을 원망해도 다시 또 돌아오는 세월의 굴레에 수긍하게 되겠지. 죽은 딸아이의 방에 한파가 들어닥치는 것이 이젠 딸아이의 쓸쓸한 영혼이 우리를 마중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 시린 추억을 안고 온 천지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천지가 옆에 있을 것 같아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홀로 천지야, 하고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였다. 텅 빈 방, 대답 없는 고요한 한기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울 때, 나는 다시 한 번 딸아이를 느낄 수 있었다.
축복처럼 등장했다 홀연히 사라진 천지. 사라진 자식을 그리워 하는 것은 참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천지의 방에 차가운 공기가 들어닥치면 사무치게 그리운 천지의 기온이 위로를 건네준다. 나는 차가운 방 안에서 밤색 목도리를 만지며 천지와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천지야, 너는 지금 어디서 무슨 모습이 되어있을까.






2212 안화정





천지가 먼저 세상을 떠난 지도 2년이 넘은 거 같다. 난 매주 화요일마다 천지를 보러갔다. 오늘은 바로 천지를 보러가는 화요일이다. 난 항상 천지를 보러갈 때마다 천지가 나에게 남겨준 쪽지를 들고간다. 천지가 남겨준 쪽지라도 들고가지않으면 온몸이 부끄러워 차마 가지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고다니는 쪽지에 천지는 날 용서한다고했지만 내가 한 짓을 돌아보면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 쪽지는 나한테 내가 한 짓을 잊지않고 용서를 빌수있게 유일하게 천지와 연결된 붉은 털실과 같은 존재였다. 천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나 또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벌써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져 내가 천지에게 했던 짓을 똑같이 되돌려받는 처지가 된 나는 학교가 얼마나 괴롭고 두려운지, 삶을 얼마나 자주 포기하고싶은지 매일매일 느끼며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때서야 천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나 스스로가 정말 역겨웠다.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했던 게 이제서야 깨닫게된다고 뭐가 바뀌겠는가. 그래서 엄마의 가게를 망하게해서라도 아무도 모른 곳으로 사라지고싶은 마음뿐이였다. 그래서 엄마가게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그릇도 훔치고 그랬던 것 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만지언니한테 들키고말았다. 왜 하필 만지언니한테 들켜야했나.그 순간 천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정말 괴로웠다. 만지언니는 그 순간에도 날 도와주려했으나 난 그것도 모른 채 천지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 화를 내고 피하게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만지언니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점점 나도 만지 언니의 진심에 대해 알게되고 천지 일에 대해 반성하게되는 마음이 커져 언니 보기가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언니는 안 좋은 길로 빠질 수 있었던 나를 도와준 아주 고마운 사람이다. 만약 내가 만지언니였다면 내 동생을 죽게 한 아이한테 이렇게 해줄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난 평생 천지와 만지언니한테 미안해하며 살아가야할 것같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면 만지언니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되었다. 나 또한 언니의 조언으로 다시 학교를 다니게되었다.
올해 겨울도 어김없이 빨간목도리덕분에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2211 신효민






화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이었다.

천지가 우리 반을 영영 떠나버린 날도 이렇게 갑작스레 다가왔던 것 같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애써 담담한 것이 그 무게를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주제에, 더 가벼운 무거움에 손을 뻗어 깊이를 느끼려 한 것 부터가 기만 같았다. 학생이 다쳤는데 경중을 따지고 있는 꼴이 부끄러워 잠시 수화기 너머의 사소한 몇 마디를 흘려보내고 말았지만, 나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몇 배는 커다란 한 아이의 시간을, 한 가족의 시간을 흘려보내고야 말았다.



.... 선생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많이 힘드실 텐데 화연이 다 나을 때 까지 학교 일은 걱정 마세요. 네, 네. 들어가세요.



영겁 같았던 찰나를 수화기와 함께 내려놓고 나니 문득 자업자득이지 않은가 하는 나쁜 생각까지 들고야 말았다. 어디까지나 내가 아무런 관계조차 없는 타자였다면 자연스럽게 할 만한 생각이다. 적어도 교사로서 학교 땅 위에 서 있는 작자가 해서는 안 될 생각일 뿐이었다. 오히려 자업자득이라 함은 천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 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고서도, 차라리 내밀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인 어설픈 손길을 내민 나를 바라보고 해야 할 말에 가까운 듯 싶었다. 지금도 힘들지 않다고 한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지만 도와달라고 말 한 마디 다 못 하고 스러진 그 아이에 비할 바가 되진 않을 것이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려 주듯이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푸른 창가는 야속하게 맑기만 했다.



천지는 정말 성실한 학생이었다. 공부도 잘 하고 착해서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그러려니 하고 안일하게 넘겼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낙인을 통한 따돌림과 배제를 주제로 당찬 목소리로 발표하던 천지는 마지막에 "혹시 당신도 예비 살인자가 아니십니까?" 라는 말로 발표를 맺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의 진짜 뜻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눈과 목소리는 화연이를 비롯해 모든 반 아이들에게, 방관자들에게, 어쩌면 담임인 나에게까지 내질러졌던 것이다. 그것을 들은 화연이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그 이후로 교실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확실했다. 자기들 딴에는 나름 비밀스럽게 불러내서 할 말 못할 말을 주고받았을 터이다. 누구나가 그걸 알아차린다는 건 의도적으로 묻어버리는 것도 역시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선생이랍시고, 그놈의 선생이랍시고 내가 했던 일을 돌이켜 보면 천지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무리와 다를 바가 한 치도 없는 것이다. 어머님, 화연이가 천지 조금 괴롭히는 거 같아서요. 떼어 놓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따위의 상투적이고 성의 없는 말들. 미라가 천지와 싸웠을 때도 둘이 그냥 껴안고 조금 토닥이면 화해할 줄 알았다. 떨어지랬다, 붙으랬다... 화연이나 미라나 전부 천지에게는 같은 공기조차 마시기 싫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유치원 아이들 대하듯 어물쩡 넘겨 버린 것이다. 이런 결과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꿈, 꿈이라. 그러고 보니 이따금 꿈에 천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지는 웃음도 울상도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저 멀리서 항상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도, 더 가까이로 뛰어가도 거리가 변하지는 않는다. 내 잘못으로 갈라진 이승과의 거리인 걸까? 한참을 뛰다 지쳐 멈추어 서서 나도 천지를 가만히 바라보면 꿈에서 깨곤 했다.

아이들은 천지를 잊은 척 하는 듯 보였다. 꽃이 놓인 그 자리를 지나갈 때면 불편한지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것이 가증스럽다 이를 수 없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침묵과 평소대로의 적당한 활기가 대류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교실 뒷문이 열린다.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운 아침 시간이었음에도 아이들은 위화감이 흐르는 공기를 곧잘 느끼고 일제히 뒤를 보았다. 십수 쌍의 무구한 눈동자가 향한 곳에는 화연이가 서 있었다.



그 전날 화연이의 어머니께서 예전보다 배는 수척해져 야윈 목소리로, 화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기억상실증을 진단받았다고 수화기 너머로 말을 전했다. 이 사실을 아는 나는 곧 조례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에게도 같은 소식을 전할 것이다. 다시 방관자들의 무리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나는 해맑게 반 아이들을 향해 눈웃음짓는 화연이가 어쩐지 소름끼쳤다.  아이들은 천지를 잊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화연이를 물어뜯기 위해 묻힌 천지를 파내는 모습에 가까웠다. 방관자들의 무리가 다시 도래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었다. 자업자득이라 다시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크게 뒤틀리고 있는 모양새다. 천지가 바란 건 이게 아닐 것이다. 그 착한 아이는 화연이를 용서하지 않을지라도 똑같은 아픔을 겪다가 똑같은 결말을 맞는 모습을 결코 원하지 않을 아이였다.
 굳이 천지의 속마음까지 헤아릴 필요 없이도, 자기를 그토록 괴롭혔던 사람을 저승에서조차 마주봐야 하는 꼴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미 내 잘못으로 멀리 떠나 버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천지를 위해서라도, 속죄라는 이기적인 독단 때문이더라도 나는 화연이가 기억을 되찾도록, 천지 곁으로 가지 않도록 도와야만 했다. 선생 된 도리로 나는 이 이상 어떤 아이도 떠나보낼 수 없었다.
 화연이는 이미 내가 이런 다짐을 곱씹어야 할 정도로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천지가 아이들을 보며 짓던 떨떠름한 표정과 아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화연이가 천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되갚음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화연이는 당연히 나조차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미 떠나간 천지조차 돕지 못했는데 믿음이 갈 리가 없다.
 
선생님. 저 조퇴시켜 주세요. 
.. 많이 힘들지?

아니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는지 화연이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데 애들이 저만 괴롭혀요. 솔직히 기억이라도 나면 미안해하는 척이라도 하겠는데.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는데 다 나보고 미쳤다고만 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조퇴시켜주는 대신에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뭔데요?

무슨 부탁인지 감도 안 잡힌다는 듯 의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화연이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천지의 유품이 담긴 상자였다. 학교에 있던 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넣어 뒀었다. 이제 온기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화연이가 그 집으로 가면서 실낱같은 기억이라도 찾아내길 바라서였다. 

이거 천지네 집에 갖다 줘. 천지 살아있을 때 쓰던 물건이야.
이걸 왜 저한테 시키세요? 다른 애 시켜도 되잖아요. 
조퇴하기 싫어? 아무리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넌 빈말로라도 천지가 네 단짝이라고 했었어. 책임은 져야지. 

화연이는 마지 못해 상자를 받아들고선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향했다. 당연히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크게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었다만 왜인지 그 뒤는 천지가 잘 해결해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창가로 들어오는 파란 하늘은 맑다.

화연이는 천지네 문을 두드렸다. 현관 앞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옅게 들리더니 잠깐의 정적 후에 천지의 언니인 만지가 한숨을 쉬며 나왔다.

이거 선생님이 갖다 드리래요. 
너한테 시켰어?
네.

만지는 얼굴을 잠시 찌푸리더니 상자를 열어 빠진 물건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화연이에게 그냥 가 보라고 말하려고 입을 떼다 상자 구석에 있는 새빨간 털실을 찾은 만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털실을 집어들었다. 서둘러 털실을 풀려 손을 댔다가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분명 네 번째 털실이다. 첫 털실은 천지가 엄마에게, 두 번째 털실은 천지가 만지에게, 세 번째 털실은 천지가 미라에게 남긴 유서가 각각 담겨 있었으니까. 

이 털실, 네가 끝까지 다 풀어 봐.

화연이는 영문도 모른 채 만지의 기에 눌려 무어라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털실을 풀었다.  털실이 풀릴수록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털실을 다 풀고 나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면 예전으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한 확신이 일고 있었다. 끝내 샛노란 메모지가 화연이의 발치에 떨어졌다. 화연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만지가 눈을 으쓱이며 신호를 보내자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 전부 용서하고 갈게. 더 이상 아무도 힘들지 않기를, 너도 힘들지 않기를. '
 
천지가 화연이에게 남긴 유서였다. 
화연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돈만 써 대면 어디든 놀러 오던 친구들이, 평생 영원할 것만 같던 친구들이 천지가 죽고 난 이후에는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를 집요하게 죄어 왔다. 똑같이 아프면서도 나는 잘못 없고 너희도 공범이라고 외치던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천지는 나를 용서했다. 모두를 용서했다. 허나 그것이 내가 과거를 잊고 살아가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억해야 했다. 나 때문에 천지가 죽었다는 걸 추하게 변명하지 말고 남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화연이는 만지를 올려다보는 듯 아니면 그 너머를 올려다보는 듯 허공에 대고 연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으로 울며 소리친다. 
작고 아늑한 아파트 복도 틈으로 들어오는 하늘 빛은 여전히 맑다. 


2223 황나민



우아한 거짓말


삑-삑.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환한 빛에 눈이 부시며, 핑- 하고 머리가 돌았다.
반사적으로 오른 손을 들어 머리를 짚자, 툭 하고 이불 위로 기다란 링거 줄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그리고 내 눈앞의 이 여자는 누구인지.

그저 무표정하게 눈동자로 그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고, 간호사와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안경을 들어올리며 들어왔다.
아래 위로 나를 훑는 눈빛들과, 투명한 박스의 실험용 쥐가 되어버린 기분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신이 드십니까”

내게 의사의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지가 중요할 뿐.

무릎을 덮은 이불에 햇빛이 빗살처럼 내려와 흔들거렸다.
창 밖은 너무나 화창하고 밝은데, 왜 나는 이렇게 텅 비어 버린 걸까.



***


화연, 내 이름은 화연이다.
이름을 묻는 나의 질문에 의사가 답하자, 가벼운 옷차림의 험상궂은 여자가 잔뜩 화가 난 채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그 여자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다짜고짜 등을 세게 내리쳤다.

“악!”

여자의 폭력에 몸을 한껏 웅크리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나를 그 여자에게서 구해준 것은 어디선가 익숙한 얼굴의
머리를 질끈 묶은 단아한 모습의 아주머니셨다.

“당신은 빠져요, 지금 애가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내 앞을 막아선 여자, 그리고 내게 화를 내는 여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저 중에 한 명은 나의 엄마, 일 것이라고.

“내가 당신들 싹 다 고소할 거야. 병원비는 또 어째!”

저 사람은 아니길 바랐는데, 엄마인가 보다.
심지어 내가 다친것 보다 병원비를 날린 것에 더 걱정하는.

나는 힐끔, 내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차라리 당신이 엄마였다면’

피식, 하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억도 없으면서 처음보는 그녀를 보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며 이번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며 나를 외면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분명 아는 얼굴인데, 기억이 도통 나지 않는다.

순간, 교복의 초록색 명찰에 시선이 닿았고 만지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찌릿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잠깐 비틀거리자 말소리가 멈추고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나를 바라보는 저 3명의 여자의 표정을 대체 알 수가 없다.
걱정, 원망, 분노, 동정, 무엇일까. 저들이 내게 보내오는 눈빛의 정체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보다 못한 의사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며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혹시, 뭐 기억 나는 건 없으십니까?”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의사 선생님은 슬쩍 저 여자 셋을 눈짓했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기억 나지 않는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

병원에서 지낸 지 이틀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았다.
교통사고. 경찰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스스로 도로변에 뛰어 들어갔댄다.
즉, 내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거다.

한달이 지나자, 장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라는 사람의 발길이 점점 뜸해졌다.
건조하고 적막한 병원 안에서의 생활이 짜증나도록 익숙해져 버렸다.
세상에 혼자 놓인 기분, 모두가 나를 찾지 않는 기분. 서럽고 외로운 기분.
문득, 활짝 웃는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천지”

나도 모르게 뱉은 이름에 당황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여자애는 금새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고 천지라는 이름만이 내게 남아 하루 종일을 따라다녔다

‘그 여자애는 누구 지?, 친구인가?, 내가 다친 걸 알고는 있는 걸까?’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나는 ‘천지‘ 라는 그 이름에 수만가지의 궁금증을 쏟아냈다.
그 아이를 떠올리려고 할 수록, 천지라는 이름을 되뇌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왠지 모르게 그립고,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다가, 나는 ‘천지’ 라는 아이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불쌍해 보이네”

팔짱을 끼고 병실 문에 기대 나를 내려다보는 것은 다름아닌 만지 였다.
처음 깨어난 이후로 한동안 오지 않더니 왜 갑자기 온 걸까.

내 표정을 읽은 만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넌 잊으면 안 돼”

천천히 내게 걸어온 만지는 주머니에서 꺼낸 노란 쪽지를 던지듯 내게 주었다.

[그래도, 용서는 하고 갈게. 나는 가도, 너는 남을 테니까.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말기를. 이제는 너도, 힘들어 하지 말기를.]

“내 동생, 천지가 네게 남긴 편지야”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머리는 새하얘졌다.
사람이 죽을 때면 자기 인생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 간다고 하잖아.
그것처럼, 나의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며 돌아와 버렸다.  


“너 앞으로 사람 갖고 놀지 마. 네가 아무리 양손에 근사한 떡을 쥐고 있어도
그 떡에  관심 없는 사람한테는 너, 별거 아니야”

천지가 죽고,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두가 나를 피하고 욕을 해댔다.
그래,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저도, 천지가 그리워요”

그래, 천지가 살아있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네가 지쳐 힘들어서 천지 곁으로 가지 않게 막을 거야.
천지 때문에, 라는 소리 안 들리게. 내 동생을 위해서”

만지는 아무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내게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제 그 잘난 기억이 돌아왔으니 알겠네.
너, 왜 죽으려고 한 거야”

네가 뭘 잘했다고, 네가 죽을 자격이 있기는 한 거냐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눈빛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을 소리쳤다.

“...나는, 나는”

“너는, 천지한테 미안한 마음 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그래서 회피한 거야. 기억을 잃으면서까지. 아니야?”

“ 그땐, 몰랐어요..! 천지가 그렇게 힘들어 할 줄은”

“핑계대지 마, 넌 알았어. 알고도 무시하고 재밌다며 깔깔댔겠지.
그런 너는, 그 어떤 변명도 핑계도 있어서는 안 돼”

천지는 붉은 눈시울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다들 천지에게 왜 그랬냐고 말하기도 지쳤어”

결국은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이미 곪아 터진 상처에 생겨버린 흉터는 평생을 갈 텐데, 우린 이런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 갈 텐데, 억울해서라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그러니까 살아, 살아서 천지한테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

벅벅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는 손과 함께,
병실을 떠나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요....정말, 미안해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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