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3 황나민
우아한 거짓말
삑-삑.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환한 빛에 눈이 부시며, 핑- 하고 머리가 돌았다.
반사적으로 오른 손을 들어 머리를 짚자, 툭 하고 이불 위로 기다란 링거 줄이
떨어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그리고 내 눈앞의 이 여자는 누구인지.
그저 무표정하게 눈동자로 그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고, 간호사와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안경을 들어올리며 들어왔다.
아래 위로 나를 훑는 눈빛들과, 투명한 박스의 실험용 쥐가 되어버린 기분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신이 드십니까”
내게 의사의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지가 중요할 뿐.
무릎을 덮은 이불에 햇빛이 빗살처럼 내려와 흔들거렸다.
창 밖은 너무나 화창하고 밝은데, 왜 나는 이렇게 텅 비어 버린 걸까.
***
화연, 내 이름은 화연이다.
이름을 묻는 나의 질문에 의사가 답하자, 가벼운 옷차림의 험상궂은 여자가 잔뜩 화가 난 채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그 여자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다짜고짜 등을 세게 내리쳤다.
“악!”
여자의 폭력에 몸을 한껏 웅크리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나를 그 여자에게서 구해준 것은 어디선가 익숙한 얼굴의
머리를 질끈 묶은 단아한 모습의 아주머니셨다.
“당신은 빠져요, 지금 애가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내 앞을 막아선 여자, 그리고 내게 화를 내는 여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저 중에 한 명은 나의 엄마, 일 것이라고.
“내가 당신들 싹 다 고소할 거야. 병원비는 또 어째!”
저 사람은 아니길 바랐는데, 엄마인가 보다.
심지어 내가 다친것 보다 병원비를 날린 것에 더 걱정하는.
나는 힐끔, 내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차라리 당신이 엄마였다면’
피식, 하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억도 없으면서 처음보는 그녀를 보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며 이번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며 나를 외면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분명 아는 얼굴인데, 기억이 도통 나지 않는다.
순간, 교복의 초록색 명찰에 시선이 닿았고 만지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찌릿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잠깐 비틀거리자 말소리가 멈추고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나를 바라보는 저 3명의 여자의 표정을 대체 알 수가 없다.
걱정, 원망, 분노, 동정, 무엇일까. 저들이 내게 보내오는 눈빛의 정체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보다 못한 의사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며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혹시, 뭐 기억 나는 건 없으십니까?”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의사 선생님은 슬쩍 저 여자 셋을 눈짓했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기억 나지 않는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
병원에서 지낸 지 이틀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았다.
교통사고. 경찰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스스로 도로변에 뛰어 들어갔댄다.
즉, 내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거다.
한달이 지나자, 장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라는 사람의 발길이 점점 뜸해졌다.
건조하고 적막한 병원 안에서의 생활이 짜증나도록 익숙해져 버렸다.
세상에 혼자 놓인 기분, 모두가 나를 찾지 않는 기분. 서럽고 외로운 기분.
문득, 활짝 웃는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천지”
나도 모르게 뱉은 이름에 당황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여자애는 금새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고 천지라는 이름만이 내게 남아 하루 종일을 따라다녔다
‘그 여자애는 누구 지?, 친구인가?, 내가 다친 걸 알고는 있는 걸까?’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나는 ‘천지‘ 라는 그 이름에 수만가지의 궁금증을 쏟아냈다.
그 아이를 떠올리려고 할 수록, 천지라는 이름을 되뇌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왠지 모르게 그립고,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다가, 나는 ‘천지’ 라는 아이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불쌍해 보이네”
팔짱을 끼고 병실 문에 기대 나를 내려다보는 것은 다름아닌 만지 였다.
처음 깨어난 이후로 한동안 오지 않더니 왜 갑자기 온 걸까.
내 표정을 읽은 만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넌 잊으면 안 돼”
천천히 내게 걸어온 만지는 주머니에서 꺼낸 노란 쪽지를 던지듯 내게 주었다.
[그래도, 용서는 하고 갈게. 나는 가도, 너는 남을 테니까.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말기를. 이제는 너도, 힘들어 하지 말기를.]
“내 동생, 천지가 네게 남긴 편지야”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머리는 새하얘졌다.
사람이 죽을 때면 자기 인생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 간다고 하잖아.
그것처럼, 나의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며 돌아와 버렸다.
“너 앞으로 사람 갖고 놀지 마. 네가 아무리 양손에 근사한 떡을 쥐고 있어도
그 떡에 관심 없는 사람한테는 너, 별거 아니야”
천지가 죽고,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두가 나를 피하고 욕을 해댔다.
그래,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저도, 천지가 그리워요”
그래, 천지가 살아있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네가 지쳐 힘들어서 천지 곁으로 가지 않게 막을 거야.
천지 때문에, 라는 소리 안 들리게. 내 동생을 위해서”
만지는 아무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내게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제 그 잘난 기억이 돌아왔으니 알겠네.
너, 왜 죽으려고 한 거야”
네가 뭘 잘했다고, 네가 죽을 자격이 있기는 한 거냐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눈빛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을 소리쳤다.
“...나는, 나는”
“너는, 천지한테 미안한 마음 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그래서 회피한 거야. 기억을 잃으면서까지. 아니야?”
“ 그땐, 몰랐어요..! 천지가 그렇게 힘들어 할 줄은”
“핑계대지 마, 넌 알았어. 알고도 무시하고 재밌다며 깔깔댔겠지.
그런 너는, 그 어떤 변명도 핑계도 있어서는 안 돼”
천지는 붉은 눈시울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다들 천지에게 왜 그랬냐고 말하기도 지쳤어”
결국은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이미 곪아 터진 상처에 생겨버린 흉터는 평생을 갈 텐데, 우린 이런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 갈 텐데, 억울해서라도 너, 죽게 안 내버려 둬.
그러니까 살아, 살아서 천지한테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
벅벅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는 손과 함께,
병실을 떠나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요....정말, 미안해요 언니”